[ESSAY]
- 평범한 동네의 하루 -
꿈꾸는 나의 동네, 부평
부평은 인천 사람들에게는 마당과 같은 곳이지만, 도시의 경계를 맞대고 있는 서울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곳이다. 그런데 언젠가 서효인 시인이 '부평'을 소재로 시를 쓴 것을 알고 놀랐다. (우리 동네를 시로 쓰다니!) 시인에게 초행길이었던 부평은 ‘버스의 도시’이자 ‘점점 커지는 욕망’이 가득찬 도시였나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평에 대해 가지는 인상이기도 한 이 표현들이 어떤 풍경에서 비롯되었는지 나는 쉽게 안다. 실제로 부평역 광장에 가보면 연두색 마을버스와 파란색 시내버스는 물론 서울의 주요 오피스타운을 잇는 빨간색 광역버스들을 볼 수 있다. 해가 진 부평1번가에는 도시의 야광 아래 취한 눈빛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 모든 혼란과 분주함이 끝나고 다시 아침이 오면, 서울로 가는 1호선 열차에 몸을 싣는 일군의 안간힘이 있다. 떠나야 할 사람들이 떠나고, 그 소란이 지나면 부평은 다시 한적해진다.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금 소란이 시작된다. 부평은 그렇게 위성도시의 전형적인 문법을 따른다. 바로 이곳이 나의 둥지였다. 자동차가 사람보다도 많은 이 길을 걸으며 인생의 엔진을 켜고, 또 삶을 운전하는 법을 배웠다.
부평을 소개하려 시작하는 글이지만 사실 어떤 방법으로도 부평을 소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그려온 부평은 '나'의 부평이고, 또 그러는 사이 꽤 시간이 흘러 이곳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부평에 대한 친절한 소개보다는 몇몇 장소에 얽힌 작은 이야기들과 거기에서 반짝였던 기억을 반추해보는 글이 될 것 같다.
# 영아다방
내가 나고 자란 곳은 부평 가운데서도 ‘산곡동’이라는 곳이다. 뫼 산(山)에 굽을 곡(谷), '산이 굽어진 곳'에 위치한 동네다. 20년 전에는 산곡동이라는 지명 대신 ‘영아다방 사거리’로 통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영아다방은 산곡동의 핫플레이스였다. 지금보다도 훨씬 가게가 드물던 시절, 영아다방은 동네 사람들이 차분히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가끔씩 어머니께서 친구분을 만나러 갈 때면 나도 자주 따라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영아다방에 가면 늘 푹신한 소파와 천장에 달린 큰 선풍기가 있었다. 아이들에게만 주던 작은 쿠키도 정말 맛있었다. 가게 한쪽의 작은 라디오에서는 느린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그때 영아다방은 지금 생각해도 꽤 ‘모던한’ 느낌의 다방이었다. 젊은 사람들로 실내가 꽤 붐볐던 기억이 난다. 무려 1956년에 개업한 이곳은 60년이 넘게 자리를 지켰고, 2012년 말, 7대 사장님에 이르러 이름을 바꿨다.
# 팬시매니아
영아다방 사거리가 산곡동의 일주문이라면 도깨비시장부터는 진짜 산곡동의 경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살던 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끼리는 도깨비시장이라고 불렀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낮부터 술에 가득 취한 아저씨들이 도깨비처럼 보여서 그랬나. 아니면 나와 친구들처럼 요란하게 뛰어다니는 꼬마들이 도깨비였을 수도 있었거나.
도깨비시장은 이름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길 어디에서나 싸움이 일어났고, 가끔은 불도 났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두 가지 구경을 심심치 않게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뛰놀았다. 차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 사람이 많거나 많지 않거나 상관없이 늘 숨차게 달리고 웃고 떠들었다. 서로의 세계를 분명하게 나누는 질서가 없었다. 그래서 도깨비시장은 편했다. 굳이 무언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허락되는 것들이 참 많았기에, 그 당시의 우리에게는 무척 즐겁고 민주적인 놀이터였다.
도깨비시장에서도 가장 인기 있던 곳은 단연 ‘팬시매니아’였다. 팬시매니아는 많은 가게 중에서도 점포 이름이 모두 영어였던 유일한 가게였다. 그 이국적인 느낌만큼이나 이곳은 산곡동을 주름잡는 트렌디한 곳이었다. 마치 신문물이 수입되던 조선의 개항장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인근의 초등학생들은 용돈만 타면 이곳으로 달려가 과소비를 하곤 했다.
가끔 용돈이 생기면 나는 학종이를 샀다. 학종이 따기에 빠져 있던 아홉 살들에게는 평평한 바닥과 학종이만 있으면 어디든 놀이터가 되었다. 나와 친구 둘이서 판을 시작하면 지나가던 모르는 아이들도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묶은 학종이 100장을 판돈으로 가져와 끼어들었다. 학종이를 바닥에 쌓고 각종 손기술로 학종이를 날려 그 수만큼 따는 게임이었다. 그렇게 모은 꼬질꼬질한 학종이를 지폐처럼 고무줄에 말아 안방 서랍장 속 박스에 쌓아뒀다. 박스가 점점 늘어나면서 가끔씩 엄마는 나 몰래 학종이를 내다 버리셨는데,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날 정말 엄청나게 울고 불고 하곤 했다.
팬시매니아에는 화장품도 있었다. 자세히 살펴본 적은 없지만, 요즘의 미샤처럼 다양한 화장품을 팔지는 않았다. 간단한 메이크업용 화장품은 특히 여중생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누나도 여기서 화장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는데, 주말만 되면 엄마 몰래 기이한 화장을 하고 나가곤 했다. 물론 작은 동네에서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장을 한 채 길을 가다가 우연히 엄마에게 걸려 집까지 붙잡혀왔고 며칠간 외출 금지를 당했다. 누나가 외출 금지를 당한 대신 누나 친구들이 매일같이 우리 집에 왔다. 그 무서운 노는 누나들이 어찌나 집에서 요란하게 놀던지, 누나들을 피해 한동안 집에 늦게 들어가곤 했다.
# 다복상회
산곡동의 조금 더 안쪽으로 가보면 ‘진짜’ 산이 굽어진 동네가 나온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일본식 가옥들과 작은 빌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두번째로 살았던 집은 바로 이 동네 빌라의 반지하였다. 정말로 산 밑 동네여서 느린 걸음으로 10분만 걸어도 산의 초입에 닿을 수 있었다. 산 어귀에 있는 동네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 조금은 일찍 해가 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 살던 시절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리 가족이 정말 힘들었던 때였기도 했고, 여기서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보내서 그런지 추억이 정말 많다.
그중 다복상회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동네 어디를 가도 ‘상회’ 대신 편의점이 있지만 예전에는 '상회'가 대부분이었다. 그곳에 가면 각종 과일부터 야채를 비롯한 식료품은 물론 생활용품까지도 살 수 있었다. 작은 가게지만 필요한 것은 다 그곳에 있었다. 깔끔하지 않아서 오히려 친근했던 그곳, 다복상회. 새삼스럽게 다시 '상- 회-'라고 발음해보니 더 정겨운 이유는 뭘까. 게다가 상회의 이름 역시 복이 많은 '다복'이니, '다복상회'라는 이름은 슈퍼 이름치고는 완벽해 보인다.
다복상회에는 병을 팔러 가곤 했다. 소주병은 30원, 맥주병은 50원 정도 쳐줬다. 집에서 나온 빈 병과 동네 어른들이 빌라 입구에 두는 병을 모아서 자주 팔았다. 열 병을 모으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2, 3일에 한 번 동네를 돌면 금방 모았다. 큰 봉지에 낑낑대며 가져가면 500원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500원이 조금 안 되어도 아주머니께서는 그냥 500원으로 바꿔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500원이 생기면 치토스 한 봉지를 샀고, 가끔 맥주병이 많이 모여 700원이 넘는 날에는 월드콘도 사먹을 수 있었다. 용돈이 없던 시절이라 병을 모아서 파는 것은 당시 나의 중요한 경제활동이었다. PC방에 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친구들과 동네를 구석구석 다니며 병을 모아 팔기도 했다. 각자의 담당 구역도 정하고 매일의 실적도 체크하면서 잘했네, 못했네 평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병을 많이 모아서 가면 다복상회 아주머니께서 흐뭇하게 웃으시며 천 원짜리 몇 장을 주셨고, 과자도 하나씩 챙겨주셨다.
근 20년 만에 다시 찾은 자리, 다복상회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게 이름도 바꾸지 않은 채. 다복상회는 그대로 다복상회다. 게다가 더 놀랍게도 그 시절에 계셨던 주인 아주머니께서 지금도 상회를 지키고 계셨다. 치토스 한 봉지에 천하를 얻은 듯했던 아홉 살의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고, 다복상회는 계속해서 한자리를 지켜왔다. 낡은 가판대와 벽의 선반들 모두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왠지 모르게 고맙다. 다복상회에게, 다복상회의 아주머니에게, 그리고 다복상회를 오갔던 내 모든 지난날에게.
# 부평의 꿈
어렸을 적 나의 유일한 엔터테인먼트 디바이스는 TV였다.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교 저학년이 재밌어할 이유가 없는 프로그램들도 참 많이 봤는데, 그중 특히 재미있던 것은 <TV는 사랑을 싣고>였다.
어렸던 내가 당시 출연자의 울고 웃는 감정들을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는 나에게 그 장면들은 여전히 큰 인상으로 남아 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같이 보낸 누군가를, 어떤 장소를 만난다는 것. 당시에는 고맙고 미안하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누군가/어딘가와 헤어지고,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다는 것. 반지하에 살던 어린 시절의 나는 금의환향을 꿈꾸었다. 더 높은 층에 사는 사람이 되어서 멋있어지자고,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되어서 다시 돌아오자고.
산곡동을 벗어난 후 우리 가족은 생활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다행히 옮길 때마다 더 깨끗하고 넓은 집으로 옮겨왔다.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에 진학해 서울을 오가기 시작했고, 몇 년 뒤에는 어머니와 다른 나라로 여행도 갔다. 내가 발 디딘 세계는 점점 넓어졌다. 세상에는 금으로 된 옷을 입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좋은 일들이 많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돌아온 부평에는 나를 반기거나 반기지 않는 누군가도, 무언가도 없다. 내가 한 시절 머물렀던 동네는 여전히 나름대로 굴러가고, 나도 내 나름대로 살아갈 뿐. 접할 수 없던 시간 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왔고, 지금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난다.
사람들은 '고향'이라는 단어에 대해 저마다의 온도를 느끼며 산다. 나는 부평에 대해 어떤 온도를 느끼고 사는 걸까. 생각해보면 부평과 함께 꿈을 꿨고, 또 그 꿈을 붙잡으려 지독히도 달렸다.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었다. 때로는 꿈을 꾸는 일이 벅차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꿈을 포기한 적도 없었다. 엔진을 끄는 방법도, 속도를 줄이는 방법도 모른 채 직진하는 방법만 배우고 달려온 걸까. 부평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부평을 떠나왔지만 여전히 부평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전히 부평에 머무는 나는 이 동네의 온도를 잘 모른다.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체온을 느끼지 못하듯이. 이따금씩 감기에 걸릴 때 어렴풋이 그 온도를 떠올릴 뿐이다. 앞으로 나의 동네가 쉽게 낯설어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꿈을 꾸는 한 나는 여전히 부평에 있을 것이기에.
글과 사진 / 권오훈
blog.naver.com/iamohhoon89
딴짓매거진 시즌 1 / 7호 발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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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평범한 동네의 하루 -
꿈꾸는 나의 동네, 부평
부평은 인천 사람들에게는 마당과 같은 곳이지만, 도시의 경계를 맞대고 있는 서울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곳이다. 그런데 언젠가 서효인 시인이 '부평'을 소재로 시를 쓴 것을 알고 놀랐다. (우리 동네를 시로 쓰다니!) 시인에게 초행길이었던 부평은 ‘버스의 도시’이자 ‘점점 커지는 욕망’이 가득찬 도시였나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평에 대해 가지는 인상이기도 한 이 표현들이 어떤 풍경에서 비롯되었는지 나는 쉽게 안다. 실제로 부평역 광장에 가보면 연두색 마을버스와 파란색 시내버스는 물론 서울의 주요 오피스타운을 잇는 빨간색 광역버스들을 볼 수 있다. 해가 진 부평1번가에는 도시의 야광 아래 취한 눈빛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 모든 혼란과 분주함이 끝나고 다시 아침이 오면, 서울로 가는 1호선 열차에 몸을 싣는 일군의 안간힘이 있다. 떠나야 할 사람들이 떠나고, 그 소란이 지나면 부평은 다시 한적해진다.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금 소란이 시작된다. 부평은 그렇게 위성도시의 전형적인 문법을 따른다. 바로 이곳이 나의 둥지였다. 자동차가 사람보다도 많은 이 길을 걸으며 인생의 엔진을 켜고, 또 삶을 운전하는 법을 배웠다.
부평을 소개하려 시작하는 글이지만 사실 어떤 방법으로도 부평을 소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그려온 부평은 '나'의 부평이고, 또 그러는 사이 꽤 시간이 흘러 이곳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부평에 대한 친절한 소개보다는 몇몇 장소에 얽힌 작은 이야기들과 거기에서 반짝였던 기억을 반추해보는 글이 될 것 같다.
# 영아다방
내가 나고 자란 곳은 부평 가운데서도 ‘산곡동’이라는 곳이다. 뫼 산(山)에 굽을 곡(谷), '산이 굽어진 곳'에 위치한 동네다. 20년 전에는 산곡동이라는 지명 대신 ‘영아다방 사거리’로 통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영아다방은 산곡동의 핫플레이스였다. 지금보다도 훨씬 가게가 드물던 시절, 영아다방은 동네 사람들이 차분히 앉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가끔씩 어머니께서 친구분을 만나러 갈 때면 나도 자주 따라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영아다방에 가면 늘 푹신한 소파와 천장에 달린 큰 선풍기가 있었다. 아이들에게만 주던 작은 쿠키도 정말 맛있었다. 가게 한쪽의 작은 라디오에서는 느린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그때 영아다방은 지금 생각해도 꽤 ‘모던한’ 느낌의 다방이었다. 젊은 사람들로 실내가 꽤 붐볐던 기억이 난다. 무려 1956년에 개업한 이곳은 60년이 넘게 자리를 지켰고, 2012년 말, 7대 사장님에 이르러 이름을 바꿨다.
# 팬시매니아
영아다방 사거리가 산곡동의 일주문이라면 도깨비시장부터는 진짜 산곡동의 경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살던 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끼리는 도깨비시장이라고 불렀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낮부터 술에 가득 취한 아저씨들이 도깨비처럼 보여서 그랬나. 아니면 나와 친구들처럼 요란하게 뛰어다니는 꼬마들이 도깨비였을 수도 있었거나.
도깨비시장은 이름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길 어디에서나 싸움이 일어났고, 가끔은 불도 났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두 가지 구경을 심심치 않게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뛰놀았다. 차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 사람이 많거나 많지 않거나 상관없이 늘 숨차게 달리고 웃고 떠들었다. 서로의 세계를 분명하게 나누는 질서가 없었다. 그래서 도깨비시장은 편했다. 굳이 무언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허락되는 것들이 참 많았기에, 그 당시의 우리에게는 무척 즐겁고 민주적인 놀이터였다.
도깨비시장에서도 가장 인기 있던 곳은 단연 ‘팬시매니아’였다. 팬시매니아는 많은 가게 중에서도 점포 이름이 모두 영어였던 유일한 가게였다. 그 이국적인 느낌만큼이나 이곳은 산곡동을 주름잡는 트렌디한 곳이었다. 마치 신문물이 수입되던 조선의 개항장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인근의 초등학생들은 용돈만 타면 이곳으로 달려가 과소비를 하곤 했다.
가끔 용돈이 생기면 나는 학종이를 샀다. 학종이 따기에 빠져 있던 아홉 살들에게는 평평한 바닥과 학종이만 있으면 어디든 놀이터가 되었다. 나와 친구 둘이서 판을 시작하면 지나가던 모르는 아이들도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묶은 학종이 100장을 판돈으로 가져와 끼어들었다. 학종이를 바닥에 쌓고 각종 손기술로 학종이를 날려 그 수만큼 따는 게임이었다. 그렇게 모은 꼬질꼬질한 학종이를 지폐처럼 고무줄에 말아 안방 서랍장 속 박스에 쌓아뒀다. 박스가 점점 늘어나면서 가끔씩 엄마는 나 몰래 학종이를 내다 버리셨는데,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날 정말 엄청나게 울고 불고 하곤 했다.
팬시매니아에는 화장품도 있었다. 자세히 살펴본 적은 없지만, 요즘의 미샤처럼 다양한 화장품을 팔지는 않았다. 간단한 메이크업용 화장품은 특히 여중생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누나도 여기서 화장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는데, 주말만 되면 엄마 몰래 기이한 화장을 하고 나가곤 했다. 물론 작은 동네에서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장을 한 채 길을 가다가 우연히 엄마에게 걸려 집까지 붙잡혀왔고 며칠간 외출 금지를 당했다. 누나가 외출 금지를 당한 대신 누나 친구들이 매일같이 우리 집에 왔다. 그 무서운 노는 누나들이 어찌나 집에서 요란하게 놀던지, 누나들을 피해 한동안 집에 늦게 들어가곤 했다.
# 다복상회
산곡동의 조금 더 안쪽으로 가보면 ‘진짜’ 산이 굽어진 동네가 나온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일본식 가옥들과 작은 빌라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두번째로 살았던 집은 바로 이 동네 빌라의 반지하였다. 정말로 산 밑 동네여서 느린 걸음으로 10분만 걸어도 산의 초입에 닿을 수 있었다. 산 어귀에 있는 동네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 조금은 일찍 해가 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 살던 시절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리 가족이 정말 힘들었던 때였기도 했고, 여기서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보내서 그런지 추억이 정말 많다.
그중 다복상회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동네 어디를 가도 ‘상회’ 대신 편의점이 있지만 예전에는 '상회'가 대부분이었다. 그곳에 가면 각종 과일부터 야채를 비롯한 식료품은 물론 생활용품까지도 살 수 있었다. 작은 가게지만 필요한 것은 다 그곳에 있었다. 깔끔하지 않아서 오히려 친근했던 그곳, 다복상회. 새삼스럽게 다시 '상- 회-'라고 발음해보니 더 정겨운 이유는 뭘까. 게다가 상회의 이름 역시 복이 많은 '다복'이니, '다복상회'라는 이름은 슈퍼 이름치고는 완벽해 보인다.
다복상회에는 병을 팔러 가곤 했다. 소주병은 30원, 맥주병은 50원 정도 쳐줬다. 집에서 나온 빈 병과 동네 어른들이 빌라 입구에 두는 병을 모아서 자주 팔았다. 열 병을 모으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2, 3일에 한 번 동네를 돌면 금방 모았다. 큰 봉지에 낑낑대며 가져가면 500원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500원이 조금 안 되어도 아주머니께서는 그냥 500원으로 바꿔주시기도 했다. 그렇게 500원이 생기면 치토스 한 봉지를 샀고, 가끔 맥주병이 많이 모여 700원이 넘는 날에는 월드콘도 사먹을 수 있었다. 용돈이 없던 시절이라 병을 모아서 파는 것은 당시 나의 중요한 경제활동이었다. PC방에 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친구들과 동네를 구석구석 다니며 병을 모아 팔기도 했다. 각자의 담당 구역도 정하고 매일의 실적도 체크하면서 잘했네, 못했네 평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병을 많이 모아서 가면 다복상회 아주머니께서 흐뭇하게 웃으시며 천 원짜리 몇 장을 주셨고, 과자도 하나씩 챙겨주셨다.
근 20년 만에 다시 찾은 자리, 다복상회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게 이름도 바꾸지 않은 채. 다복상회는 그대로 다복상회다. 게다가 더 놀랍게도 그 시절에 계셨던 주인 아주머니께서 지금도 상회를 지키고 계셨다. 치토스 한 봉지에 천하를 얻은 듯했던 아홉 살의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고, 다복상회는 계속해서 한자리를 지켜왔다. 낡은 가판대와 벽의 선반들 모두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왠지 모르게 고맙다. 다복상회에게, 다복상회의 아주머니에게, 그리고 다복상회를 오갔던 내 모든 지난날에게.
# 부평의 꿈
어렸을 적 나의 유일한 엔터테인먼트 디바이스는 TV였다.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교 저학년이 재밌어할 이유가 없는 프로그램들도 참 많이 봤는데, 그중 특히 재미있던 것은 <TV는 사랑을 싣고>였다.
어렸던 내가 당시 출연자의 울고 웃는 감정들을 이해했을 리는 만무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는 나에게 그 장면들은 여전히 큰 인상으로 남아 있다. 과거의 한 시절을 같이 보낸 누군가를, 어떤 장소를 만난다는 것. 당시에는 고맙고 미안하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누군가/어딘가와 헤어지고,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다는 것. 반지하에 살던 어린 시절의 나는 금의환향을 꿈꾸었다. 더 높은 층에 사는 사람이 되어서 멋있어지자고,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되어서 다시 돌아오자고.
산곡동을 벗어난 후 우리 가족은 생활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다행히 옮길 때마다 더 깨끗하고 넓은 집으로 옮겨왔다.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에 진학해 서울을 오가기 시작했고, 몇 년 뒤에는 어머니와 다른 나라로 여행도 갔다. 내가 발 디딘 세계는 점점 넓어졌다. 세상에는 금으로 된 옷을 입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좋은 일들이 많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돌아온 부평에는 나를 반기거나 반기지 않는 누군가도, 무언가도 없다. 내가 한 시절 머물렀던 동네는 여전히 나름대로 굴러가고, 나도 내 나름대로 살아갈 뿐. 접할 수 없던 시간 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왔고, 지금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난다.
사람들은 '고향'이라는 단어에 대해 저마다의 온도를 느끼며 산다. 나는 부평에 대해 어떤 온도를 느끼고 사는 걸까. 생각해보면 부평과 함께 꿈을 꿨고, 또 그 꿈을 붙잡으려 지독히도 달렸다.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었다. 때로는 꿈을 꾸는 일이 벅차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꿈을 포기한 적도 없었다. 엔진을 끄는 방법도, 속도를 줄이는 방법도 모른 채 직진하는 방법만 배우고 달려온 걸까. 부평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래서인지, 부평을 떠나왔지만 여전히 부평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전히 부평에 머무는 나는 이 동네의 온도를 잘 모른다.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체온을 느끼지 못하듯이. 이따금씩 감기에 걸릴 때 어렴풋이 그 온도를 떠올릴 뿐이다. 앞으로 나의 동네가 쉽게 낯설어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꿈을 꾸는 한 나는 여전히 부평에 있을 것이기에.
글과 사진 / 권오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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