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나도 참 나다.
회의는 몇 시간째 계속되었고,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뭔가를 끼적였다. ‘뭔가’라고 표현한 이유는 나도 내가 무엇을 적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첩엔 정직한 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마음의 소리가 바로 활자가 될 줄은 몰랐다. 오른손이 한 일을 뇌가 모르게 하다니! 나는 태연한 척 무의식의 내가 쓴 낙서를 연필로 새카맣게 덮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월급이 사실상 회의비나 마찬가지인 팀에서 햇수로 4년을 일했다. 신입 때부터 각종 회의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회의 준비, 회의 참석, 회의록 정리를 하다 보면 하루가 가고, 다음날에 실무자 회의, 의사 결정자에게 보고, 다시 후속 회의를 하다 보면 일주일, 한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회의란 무엇인가. 회의(會議)를 계속하다 보면 회의(懷疑)하게 된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일해야 하나 싶다. 소모적인 논쟁에 지친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모두가 그 논
쟁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열을 내는지 의문일 때가 많았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자 곤혹스러운 회의를 버티는 요령이 생겼다. 몸만 테이블에 두고 정신은 회의실 문 앞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1인칭이 아니라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인데, 심각했던 회의가 그렇게 우스워 보일 수가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 못지않은 부조리극을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관조하다 보면 회의 내용보다는 테이블에 앉은 인물에게 흥미가 생겼다.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은 <그게 다 외로워서래>라는 노래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얘기를 한 다음 “아 사랑스런 사람들 외로워서 사랑스런 사람들”이라는 후렴구를 반복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노래를 부르며 회의 참석자들을 바라본다. “으으 스릉스른 스름들”이라고 승화한다. 회의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회의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크게 5개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핵심 없이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만연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가끔씩 “제가 지금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네요.”라고 한다. 가령 A안과 B안, C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이들은 이런 식이다.
“A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고 십분 이해합니다만, B라는 측면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하지만, 또 C라는 부분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에 대해서 저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지만은, 솔직히 D라는 리스크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실무자 입장에서는 E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
두번째는 일명 ‘엑스맨’인데, 우리 팀이나 부서를 대변해야 할 사람이 내부적으로 합의한 내용을 무시하고 갑자기 저쪽 편을 드는 경우다.
“아니, 사실 나는 처음에 그게 더 맞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내 의견이 반영이 안 됐어요. 거봐,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하자고 했잖아.”
이들은 상습적으로 엑스맨이 되기 때문에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한편, 반대로 ‘역’ 엑스맨이 되는 일도 있다. 내내 외부자의 태도로 선을 긋던 사람이 갑자기 내부자로 태세 전환을 하며 ‘우리’라고 칭할 때다. 이들의 특징은 상황에 따라 입장을 계속 바꾼다는 건데, 그 순간만큼은 언제나 진심이다.
세번째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건 책임과 권한을 가진 의사결정자들이다. 이들이 하는 말만 듣고 보면 틀린 게 없다. 하나같이 바른말, 옳은 말이다. 문제는 주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잘못은 모두 다른 사람이 했고 자신은 흠결이 없다. 이들은 꼭 일이 터지고 나면 자신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을 그때 가서야 한다. 의사결정자가 유체이탈 화법을 선보일 때의 당혹감과 배신감은 아무리 반복해서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네번째는 앵무새다. 같은 말만 반복한다. 이들이 다른 의견을 모두 검토해본 후에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인지, 아는 게 그거 하나뿐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후자의 경우에는 몇 년이 지나도 동어반복만 한다. 사람이 학습하지 않으면 고민에 발전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 배웠다. 이들에게는 타협도 없고 물러섬도 없는데, 가끔 모두가 지쳐 그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꽤 효과적인 전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섯번째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과 회의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들은 자신을 뺀 나머지 우주를 모두 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원탁은 없고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직사각형 식탁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평화란 힘의 균형으로 인해 전쟁이 없는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옆자리, 대각선 앞자리 사람은 없고 오로지 나의 대척점에 선 자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를 둘러싼 세계도 변한다. 바야흐로 ‘불신지옥’이 된다. 아무도 서로를 믿지 않는다. 내민 내 손이 머쓱해지고 상대와 나 사이에 놓인 블랙홀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도 안간힘을 쓴다. 정신을 차려보면 방어 아니면 공격뿐인 세상이 되어 있다. 웃으며 공격하거나 미간을 찌푸리고 공격하거나. 대놓고 방어하거나 돌려서 방어하거나 문서로 방어하거나 말로 방어하거나. 어떤 방법과 표정을 사용하는가가 나의 능력이었다.
모든 회의에는 다섯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회의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유치한 힘겨루기만 하다 끝나는 날도 있었다. 하루에 회의를 서너 개씩 하는 날에는 영혼이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면 등장인물들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싱긋 웃어 보였다. 자연인 상태의 누군가와 어떤 집단을 대변하는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었다. ‘팀의 의견’이란 것도 그랬다. 팀이란 건 결국 사람들의 집합인데, ‘팀의 의견’은 팀원들 의견의 합집합이 아니었다. 때로 집단의 의견이란 실체가 없거나, 대표 한 사람의 의견일 뿐이었다. ‘팀 간의 갈등’이란 것도 실제로는 ‘팀장 간의 갈등’에 불과하거나 누군가의 관념일 뿐이었다. 마치 도깨비불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텅 빈 무대 같은 회의실에 홀로 앉아 그날의 회의를 복기하곤 했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흥분한 내가 부끄러웠다. 끝나고 말갛게 웃어 보이지 못하는 내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게 ‘프로페셔널’일까.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그 안에 묻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인의 나로 돌아와 “하하호호”하며 잘 지내면 되는 걸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세계에서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나 역시 그 세계의 충실한 구성원이었다.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일 뿐이었다. 나는 자주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왔다. 원탁에 둘러앉아 공동의 선(善)을 그리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모두에게 무해한 사람으로 사는 건 불가능한 바람일지 모른다.
인터넷을 할 때마다 취미를 만들라는 광고가 보였다. 한두 번 클릭했더니 비슷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회사를 죄다 소개해줄 기세였다. 아이돌 댄스를 배우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와인의 역사와 종류를 알아보라 했다.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취향의 공동체를 만들어 수평적 대화를 즐기라 했다. 취미로 자기 계발을 하라고 했다. 조금 솔깃하긴 했다. 내겐 특별히 취미라 부를 만한 게 없었다. 스쿠버다이빙을 하지만 1년에 한 번 하러 갈까 말까 하고, 트레킹을 좋아하지만 말 그대로 좋아하기만 할 뿐이다.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광’정도는 아니다. 내 취향은 습자지처럼 얕아서 ‘덕후’를 만나면 밑천이 금세 들통난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영화·음악·책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일상은 무료했고 하루하루가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러닝머신은 원래 죄수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고문 기계라고 하던데. 매일 똑같은 풍경, 조금의 변주도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무료함은 무기력함이 되었다. 여름은 더웠고 나는 액체 괴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퇴근 후 저녁을 거른 채로 침대에 철퍼덕 엎어져 유튜브만 몇 시간씩 보다 잠들곤 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유행하는 ‘히피펌’을 해보았지만, 산뜻함은 며칠을 못 갔다. 모든 것은 익숙해진다. 세상만
사가 지루하고 지겨웠다.
‘뭐 좀 재밌는 것 없을까.’
나는 거의 발악하는 심정으로 스윙 댄스 1일 체험을 신청했다. 한 동호회가 신규 회원을 모집할 겸 여는 행사였다. 특별히 스윙 댄스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다. 어쨌든 몸은 좀 움직여야 했고 이래 봬도 흥은 넘치는 편이니까. 댄스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스윙 댄스의 심리적 진입장벽이 낮았다. 살사와 탱고는 몸이나 성격 둘 중 하나는 관능적인 사람이 춰야 멋질 것 같았다. 둘 다 해당 사항이 없는 나는 호기롭게 <라라랜드>를 꿈꾸며 스윙 댄스를 선택했다.
댄스홀에 들어서자 나처럼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수십 명의 직장인 남녀가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어림잡아 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개중에 몇몇은 ‘여기서 누구라도 좀 꼬셔볼까’하는 기대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뿔싸, 처음 본 사람과 짝을 지어 춤을 춘다는 걸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낯선 사람들뿐인 곳에 있으려니 강습을 신청한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어제의 나는 무슨 의욕이 그리도 넘쳤던가.
참가자들은 큰 원 모양으로 빙 둘러섰다. 남자가 바깥쪽에 서고 여자가 안쪽에 섰다. 안쪽 원이 돌아가며 파트너를 계속 바꾸는 식이었다. 마주 선 남녀는 놀이공원 직원처럼 손을 반짝반짝 흔들어 보이며 첫인사를 했다. 스윙 댄스에는 ‘리더’와 ‘팔로워’가 있는데 말 그대로 리더가 다음 스텝이나 동작을 이끈다고 했다. 주로 남자가 리더를, 여자가 팔로워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거 참 클래식한 춤이네.’
나는 조금 민망했지만 성실하게 강습을 ‘팔로우’했다. 한 동작이 끝나고 나면 파트너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하루에 그렇게 많은 남자들과 손을 잡은 건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입꼬리가 마비되기 직전이었지만, 홀을 가득 채우는 음악 덕에 귀는 즐거웠다. 빅밴드가 연주하는 1930년대 재즈 음악은 화려하고 리드미컬했다.
어찌어찌 겨우 강습이 끝나고 동호회원들의 ‘프리 댄스’가 이어졌다. 그 시간에는 누구나 아무하고나 춤을 출 수 있었다. 강습 때만 해도 시큰둥했던 나는 그 프리 댄스를 보고 ‘컬처 쇼크’를 받았다. 록 페스티벌이나 디제이 파티 같은 곳에는 몇 번 가봤지만 이런 댄스 타임은 또 처음이었다. 영화 주인공처럼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홀에 등장했다. 공작새처럼 등을 곧추세운 사람들이 클래식한 재즈 음악에 맞추어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내가 놀란 건 그들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기 있고 행복한 얼굴들을 한꺼번에 본 건 오랜만이었다. 좀 과장하자면 생의 에너지 같은 거였다. 펄떡거리는 몸보다도 그들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야, 나만 방구석에서 암막 커튼 쳐놓고 <왕좌의 게임>이나 보고 있는 건가? 나만 빼고 다들 이렇게 재밌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나?’
뒤풀이에 가자고 내 팔을 잡아끄는 동호회 운영진을 뒤로 하고 집으로 내뺐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꼭 자랑할 만한 취미일 필요는 없었다. 문득 부산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친구 집에서 “이거 들어봤어?”라며 각자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을 홀짝거리고 싶었다. 광안리 밤바다가 보고 싶었다. 탁 트인 잔디밭에서 80년대 디스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젖히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나를 즐겁게 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집에 돌아와 빔 프로젝터를 켜고 좋아하는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연말정산 환급금을 넉넉히 받은 기념으로 산 빔 프로젝터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내면의 흥이 끓어올랐다. 둠칫 두둠칫.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방정맞게 춤을 췄다. 발을 구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키가 큰 나무처럼 두 팔을 천장을 향해 쭉 뻗고 흐느적거렸다. 친구들과 ‘서울인기’나 ‘DMZ 페스티벌’에 가야지. 바람이 숭숭 통하는 리넨 원피스를 입고 친구들과 강강술래를 해야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뛰어놀아야지. 친구에게 이번 주말에 보자고 당장 연락해야지. 나는 피식피식 웃었다. 에어컨 바람에 목덜미가 시원해졌다.
글 / 민영
마음이 헤픈 사람. 흥이 오르면 춤을 춘다.
minyoung.ohh@gmail.com
딴짓매거진 시즌 1 / 11호 발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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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나다.
회의는 몇 시간째 계속되었고,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뭔가를 끼적였다. ‘뭔가’라고 표현한 이유는 나도 내가 무엇을 적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첩엔 정직한 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마음의 소리가 바로 활자가 될 줄은 몰랐다. 오른손이 한 일을 뇌가 모르게 하다니! 나는 태연한 척 무의식의 내가 쓴 낙서를 연필로 새카맣게 덮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월급이 사실상 회의비나 마찬가지인 팀에서 햇수로 4년을 일했다. 신입 때부터 각종 회의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회의 준비, 회의 참석, 회의록 정리를 하다 보면 하루가 가고, 다음날에 실무자 회의, 의사 결정자에게 보고, 다시 후속 회의를 하다 보면 일주일, 한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회의란 무엇인가. 회의(會議)를 계속하다 보면 회의(懷疑)하게 된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일해야 하나 싶다. 소모적인 논쟁에 지친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모두가 그 논
쟁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열을 내는지 의문일 때가 많았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자 곤혹스러운 회의를 버티는 요령이 생겼다. 몸만 테이블에 두고 정신은 회의실 문 앞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1인칭이 아니라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인데, 심각했던 회의가 그렇게 우스워 보일 수가 없다. <고도를 기다리며> 못지않은 부조리극을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관조하다 보면 회의 내용보다는 테이블에 앉은 인물에게 흥미가 생겼다.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은 <그게 다 외로워서래>라는 노래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얘기를 한 다음 “아 사랑스런 사람들 외로워서 사랑스런 사람들”이라는 후렴구를 반복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노래를 부르며 회의 참석자들을 바라본다. “으으 스릉스른 스름들”이라고 승화한다. 회의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회의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크게 5개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핵심 없이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만연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가끔씩 “제가 지금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저도 모르겠네요.”라고 한다. 가령 A안과 B안, C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이들은 이런 식이다.
“A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고 십분 이해합니다만, B라는 측면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하지만, 또 C라는 부분도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점에 대해서 저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지만은, 솔직히 D라는 리스크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실무자 입장에서는 E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
두번째는 일명 ‘엑스맨’인데, 우리 팀이나 부서를 대변해야 할 사람이 내부적으로 합의한 내용을 무시하고 갑자기 저쪽 편을 드는 경우다.
“아니, 사실 나는 처음에 그게 더 맞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내 의견이 반영이 안 됐어요. 거봐,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하자고 했잖아.”
이들은 상습적으로 엑스맨이 되기 때문에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한편, 반대로 ‘역’ 엑스맨이 되는 일도 있다. 내내 외부자의 태도로 선을 긋던 사람이 갑자기 내부자로 태세 전환을 하며 ‘우리’라고 칭할 때다. 이들의 특징은 상황에 따라 입장을 계속 바꾼다는 건데, 그 순간만큼은 언제나 진심이다.
세번째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건 책임과 권한을 가진 의사결정자들이다. 이들이 하는 말만 듣고 보면 틀린 게 없다. 하나같이 바른말, 옳은 말이다. 문제는 주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잘못은 모두 다른 사람이 했고 자신은 흠결이 없다. 이들은 꼭 일이 터지고 나면 자신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을 그때 가서야 한다. 의사결정자가 유체이탈 화법을 선보일 때의 당혹감과 배신감은 아무리 반복해서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네번째는 앵무새다. 같은 말만 반복한다. 이들이 다른 의견을 모두 검토해본 후에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인지, 아는 게 그거 하나뿐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후자의 경우에는 몇 년이 지나도 동어반복만 한다. 사람이 학습하지 않으면 고민에 발전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 배웠다. 이들에게는 타협도 없고 물러섬도 없는데, 가끔 모두가 지쳐 그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꽤 효과적인 전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다섯번째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과 회의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이들은 자신을 뺀 나머지 우주를 모두 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원탁은 없고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직사각형 식탁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평화란 힘의 균형으로 인해 전쟁이 없는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옆자리, 대각선 앞자리 사람은 없고 오로지 나의 대척점에 선 자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를 둘러싼 세계도 변한다. 바야흐로 ‘불신지옥’이 된다. 아무도 서로를 믿지 않는다. 내민 내 손이 머쓱해지고 상대와 나 사이에 놓인 블랙홀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나도 안간힘을 쓴다. 정신을 차려보면 방어 아니면 공격뿐인 세상이 되어 있다. 웃으며 공격하거나 미간을 찌푸리고 공격하거나. 대놓고 방어하거나 돌려서 방어하거나 문서로 방어하거나 말로 방어하거나. 어떤 방법과 표정을 사용하는가가 나의 능력이었다.
모든 회의에는 다섯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회의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유치한 힘겨루기만 하다 끝나는 날도 있었다. 하루에 회의를 서너 개씩 하는 날에는 영혼이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면 등장인물들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싱긋 웃어 보였다. 자연인 상태의 누군가와 어떤 집단을 대변하는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었다. ‘팀의 의견’이란 것도 그랬다. 팀이란 건 결국 사람들의 집합인데, ‘팀의 의견’은 팀원들 의견의 합집합이 아니었다. 때로 집단의 의견이란 실체가 없거나, 대표 한 사람의 의견일 뿐이었다. ‘팀 간의 갈등’이란 것도 실제로는 ‘팀장 간의 갈등’에 불과하거나 누군가의 관념일 뿐이었다. 마치 도깨비불과 싸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텅 빈 무대 같은 회의실에 홀로 앉아 그날의 회의를 복기하곤 했다. 얼굴이 벌게지도록 흥분한 내가 부끄러웠다. 끝나고 말갛게 웃어 보이지 못하는 내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게 ‘프로페셔널’일까.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그 안에 묻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연인의 나로 돌아와 “하하호호”하며 잘 지내면 되는 걸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세계에서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나 역시 그 세계의 충실한 구성원이었다.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일 뿐이었다. 나는 자주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왔다. 원탁에 둘러앉아 공동의 선(善)을 그리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모두에게 무해한 사람으로 사는 건 불가능한 바람일지 모른다.
인터넷을 할 때마다 취미를 만들라는 광고가 보였다. 한두 번 클릭했더니 비슷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회사를 죄다 소개해줄 기세였다. 아이돌 댄스를 배우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와인의 역사와 종류를 알아보라 했다.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취향의 공동체를 만들어 수평적 대화를 즐기라 했다. 취미로 자기 계발을 하라고 했다. 조금 솔깃하긴 했다. 내겐 특별히 취미라 부를 만한 게 없었다. 스쿠버다이빙을 하지만 1년에 한 번 하러 갈까 말까 하고, 트레킹을 좋아하지만 말 그대로 좋아하기만 할 뿐이다.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광’정도는 아니다. 내 취향은 습자지처럼 얕아서 ‘덕후’를 만나면 밑천이 금세 들통난다. 게다가 요즘 세상에 영화·음악·책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일상은 무료했고 하루하루가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러닝머신은 원래 죄수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고문 기계라고 하던데. 매일 똑같은 풍경, 조금의 변주도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무료함은 무기력함이 되었다. 여름은 더웠고 나는 액체 괴물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퇴근 후 저녁을 거른 채로 침대에 철퍼덕 엎어져 유튜브만 몇 시간씩 보다 잠들곤 했다. 기분전환을 위해 유행하는 ‘히피펌’을 해보았지만, 산뜻함은 며칠을 못 갔다. 모든 것은 익숙해진다. 세상만
사가 지루하고 지겨웠다.
‘뭐 좀 재밌는 것 없을까.’
나는 거의 발악하는 심정으로 스윙 댄스 1일 체험을 신청했다. 한 동호회가 신규 회원을 모집할 겸 여는 행사였다. 특별히 스윙 댄스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다. 어쨌든 몸은 좀 움직여야 했고 이래 봬도 흥은 넘치는 편이니까. 댄스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스윙 댄스의 심리적 진입장벽이 낮았다. 살사와 탱고는 몸이나 성격 둘 중 하나는 관능적인 사람이 춰야 멋질 것 같았다. 둘 다 해당 사항이 없는 나는 호기롭게 <라라랜드>를 꿈꾸며 스윙 댄스를 선택했다.
댄스홀에 들어서자 나처럼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수십 명의 직장인 남녀가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어림잡아 오십 명은 되어 보였다. 개중에 몇몇은 ‘여기서 누구라도 좀 꼬셔볼까’하는 기대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뿔싸, 처음 본 사람과 짝을 지어 춤을 춘다는 걸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낯선 사람들뿐인 곳에 있으려니 강습을 신청한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어제의 나는 무슨 의욕이 그리도 넘쳤던가.
참가자들은 큰 원 모양으로 빙 둘러섰다. 남자가 바깥쪽에 서고 여자가 안쪽에 섰다. 안쪽 원이 돌아가며 파트너를 계속 바꾸는 식이었다. 마주 선 남녀는 놀이공원 직원처럼 손을 반짝반짝 흔들어 보이며 첫인사를 했다. 스윙 댄스에는 ‘리더’와 ‘팔로워’가 있는데 말 그대로 리더가 다음 스텝이나 동작을 이끈다고 했다. 주로 남자가 리더를, 여자가 팔로워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거 참 클래식한 춤이네.’
나는 조금 민망했지만 성실하게 강습을 ‘팔로우’했다. 한 동작이 끝나고 나면 파트너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하루에 그렇게 많은 남자들과 손을 잡은 건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입꼬리가 마비되기 직전이었지만, 홀을 가득 채우는 음악 덕에 귀는 즐거웠다. 빅밴드가 연주하는 1930년대 재즈 음악은 화려하고 리드미컬했다.
어찌어찌 겨우 강습이 끝나고 동호회원들의 ‘프리 댄스’가 이어졌다. 그 시간에는 누구나 아무하고나 춤을 출 수 있었다. 강습 때만 해도 시큰둥했던 나는 그 프리 댄스를 보고 ‘컬처 쇼크’를 받았다. 록 페스티벌이나 디제이 파티 같은 곳에는 몇 번 가봤지만 이런 댄스 타임은 또 처음이었다. 영화 주인공처럼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홀에 등장했다. 공작새처럼 등을 곧추세운 사람들이 클래식한 재즈 음악에 맞추어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내가 놀란 건 그들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기 있고 행복한 얼굴들을 한꺼번에 본 건 오랜만이었다. 좀 과장하자면 생의 에너지 같은 거였다. 펄떡거리는 몸보다도 그들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야, 나만 방구석에서 암막 커튼 쳐놓고 <왕좌의 게임>이나 보고 있는 건가? 나만 빼고 다들 이렇게 재밌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나?’
뒤풀이에 가자고 내 팔을 잡아끄는 동호회 운영진을 뒤로 하고 집으로 내뺐다.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꼭 자랑할 만한 취미일 필요는 없었다. 문득 부산에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친구 집에서 “이거 들어봤어?”라며 각자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을 홀짝거리고 싶었다. 광안리 밤바다가 보고 싶었다. 탁 트인 잔디밭에서 80년대 디스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 젖히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나를 즐겁게 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집에 돌아와 빔 프로젝터를 켜고 좋아하는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연말정산 환급금을 넉넉히 받은 기념으로 산 빔 프로젝터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내면의 흥이 끓어올랐다. 둠칫 두둠칫.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방정맞게 춤을 췄다. 발을 구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키가 큰 나무처럼 두 팔을 천장을 향해 쭉 뻗고 흐느적거렸다. 친구들과 ‘서울인기’나 ‘DMZ 페스티벌’에 가야지. 바람이 숭숭 통하는 리넨 원피스를 입고 친구들과 강강술래를 해야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을 추며 뛰어놀아야지. 친구에게 이번 주말에 보자고 당장 연락해야지. 나는 피식피식 웃었다. 에어컨 바람에 목덜미가 시원해졌다.
글 / 민영
마음이 헤픈 사람. 흥이 오르면 춤을 춘다.
minyoung.ohh@gmail.com
딴짓매거진 시즌 1 / 11호 발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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