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기억의 조각보
<집의 시간들>은 재개발로 철거가 예정된 서울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다. 30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늙어간 아파트에는 그만큼이나 오래된 나무와 녹지가 마치 공원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인물의 목소리는 내레이션으로 나올 뿐, 스크린을 채우는 건 낡은 아파트 구석구석의 정경이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린 부엌 식탁, 그 아이가 키를 재던 문틀, 베란다 가득 정성들여 키우는 화초, 짝이 맞지 않는 세간살이…… 삶터가 그 수명을 다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 평범한 순간들이 모여 오늘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된다.
이른바 ‘핫한 길’이 넘쳐난다. 망리단길이나 연트럴파크, 샤로수길처럼 맛집과 눈요깃거리가 많은 동네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한다. 유튜버와 블로거들이 들렀다는 가게에서 밥을 먹으려면 한두 시간씩 줄을 서는 건 예사고, 비정상적으로 치솟는 월세와 권리금에 원 거주민들은 동네에서 밀려나 도망치듯 떠난다. 동네의 가치는 ‘부동산’의 논리로만 평가된 지 오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핫플레이스’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떤 동네를 궁금해할 일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일도 없는 걸까? 지하철에서 한 번도 목적지가 된 적 없는 동네, 행정구역상의 이름조차 낯선 동네가 궁금했다. 나와 내 친구, 우리 주변 누군가의 고향이자 삶터인 그곳. 급조된 감성과 힙함 대신 조금 낯설지만 오래 묵은 향기가 있는 누군가의 동네에 발걸음하고 싶었다.
구의동과 이매동, 일원본동과 산곡동, 삼평동과 당수동…… 『평범한 동네의 하루』는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이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동네의 이야기가 담긴 산문집이자 기록서다. 강남은 지천으로 논밭이었고 잠실은 누에치던 동네였다는 할머니의 산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두에게는 장소에 얽힌 기억이 있다. 빨리 잊고 싶은 고됨이 스며 있는 곳이든, 밋밋한 일상이 고여 있는 곳이든,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곳이든, 각자의 기억이 모여 동네는 존재한다. 『평범한 동네의 하루』의 저자들이 풀어놓은 건 동네의 기억이자 그 시기를 지나온 자신과의 마주함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찾게 되었을 때, 저자들은 옛 동네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임에 자못 놀란다. 변하지 않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기억은 빠르게 소환되고, 매일 바쁘게 지나느라 알지 못했던 성장을 깨닫게 된다.
평범한 동네의 하루를 기록하는 건, 그래서 사사로운 기억의 복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억의 조각보를 모아 만든 지도가, 동네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수 있다. 오늘 내 삶터는 무사한지 들여다보는 질문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질문의 지도를 그려보는 건 로컬의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주목받는 이때에 더욱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귀중한 이야기를 내어준 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동네가 품은 서사에 귀기울여주시기를 다시 한번 청한다.
황은주
차례
모두가 토박이인 동네에서, 모두가 전학생인 동네로
일원본동 · 쿠퍼티노
사실은 그 불이 꺼진 적 없다는 걸
산곡동
지금 우리는 어디까지 온 걸까?
구의동
고시원―1평들이 모여 이루는 누군가의 동네
노량진동
언젠가는 별다를 게 없어지더라도
창천동
나와 외국인과 흰 삽살개
해방촌
오래된 신도시
이매동
판교의 기술 골짜기
삼평동
계속 걷게 만드는 동네
성북동
참 좋았던 시절
당수동
프롤로그
기억의 조각보
<집의 시간들>은 재개발로 철거가 예정된 서울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다. 30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늙어간 아파트에는 그만큼이나 오래된 나무와 녹지가 마치 공원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 인물의 목소리는 내레이션으로 나올 뿐, 스크린을 채우는 건 낡은 아파트 구석구석의 정경이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린 부엌 식탁, 그 아이가 키를 재던 문틀, 베란다 가득 정성들여 키우는 화초, 짝이 맞지 않는 세간살이…… 삶터가 그 수명을 다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 평범한 순간들이 모여 오늘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된다.
이른바 ‘핫한 길’이 넘쳐난다. 망리단길이나 연트럴파크, 샤로수길처럼 맛집과 눈요깃거리가 많은 동네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한다. 유튜버와 블로거들이 들렀다는 가게에서 밥을 먹으려면 한두 시간씩 줄을 서는 건 예사고, 비정상적으로 치솟는 월세와 권리금에 원 거주민들은 동네에서 밀려나 도망치듯 떠난다. 동네의 가치는 ‘부동산’의 논리로만 평가된 지 오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핫플레이스’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떤 동네를 궁금해할 일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일도 없는 걸까? 지하철에서 한 번도 목적지가 된 적 없는 동네, 행정구역상의 이름조차 낯선 동네가 궁금했다. 나와 내 친구, 우리 주변 누군가의 고향이자 삶터인 그곳. 급조된 감성과 힙함 대신 조금 낯설지만 오래 묵은 향기가 있는 누군가의 동네에 발걸음하고 싶었다.
구의동과 이매동, 일원본동과 산곡동, 삼평동과 당수동…… 『평범한 동네의 하루』는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이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동네의 이야기가 담긴 산문집이자 기록서다. 강남은 지천으로 논밭이었고 잠실은 누에치던 동네였다는 할머니의 산역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두에게는 장소에 얽힌 기억이 있다. 빨리 잊고 싶은 고됨이 스며 있는 곳이든, 밋밋한 일상이 고여 있는 곳이든,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곳이든, 각자의 기억이 모여 동네는 존재한다. 『평범한 동네의 하루』의 저자들이 풀어놓은 건 동네의 기억이자 그 시기를 지나온 자신과의 마주함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찾게 되었을 때, 저자들은 옛 동네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임에 자못 놀란다. 변하지 않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기억은 빠르게 소환되고, 매일 바쁘게 지나느라 알지 못했던 성장을 깨닫게 된다.
평범한 동네의 하루를 기록하는 건, 그래서 사사로운 기억의 복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억의 조각보를 모아 만든 지도가, 동네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수 있다. 오늘 내 삶터는 무사한지 들여다보는 질문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질문의 지도를 그려보는 건 로컬의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주목받는 이때에 더욱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귀중한 이야기를 내어준 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동네가 품은 서사에 귀기울여주시기를 다시 한번 청한다.
황은주
차례
모두가 토박이인 동네에서, 모두가 전학생인 동네로
일원본동 · 쿠퍼티노
사실은 그 불이 꺼진 적 없다는 걸
산곡동
지금 우리는 어디까지 온 걸까?
구의동
고시원―1평들이 모여 이루는 누군가의 동네
노량진동
언젠가는 별다를 게 없어지더라도
창천동
나와 외국인과 흰 삽살개
해방촌
오래된 신도시
이매동
판교의 기술 골짜기
삼평동
계속 걷게 만드는 동네
성북동
참 좋았던 시절
당수동